피플 > 환자 이야기 살아줘서 고마워, 여보 2022.09.02

 

전주의 한 병원에서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아내의 수술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수술은 끝났고 지혈하는 데 2~3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의사는 한마디 후 수술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곤 날이 새도록 수술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여 년을 앓아온 심장판막증이지만 이번처럼 마음 졸인 적은 없었다. 새벽 4시. 의사가 나왔다. 영문을 묻고 싶지만 의사의 기진맥진한 모습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호흡이 불안하고 부기가 빠지지 않은 채로 90여 일을 보냈다. 결국 의사는 심장이식이 필요할 수 있다며 서울아산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막막하고 절박한

구급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는 이미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로 가득했다. 제한 시간 24시간이라는 안내 문구에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중환자실 자리가 나지 않으면 아내는 또다시 투석이 가능한 병원으로 이송될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도 힘들게 왔는데….’ 기다리는 내내 막막하고 절박했다. 그 사이, 아내는 의식을 잃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내는 인공호흡기 치료를 시작했다.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매일 아침 심장내과 현준호 교수와 통화했다. 답답할 때마다 ‘아내에게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라며 간호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꺼이 메신저 역할을 해주는 이들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었다. 아내는 1987년에 나와 결혼해 변변치 않은 살림에 온갖 고생을 해왔다. 그런데도 내 작업복을 항상 곱게 다려 놓고 주머니에 용돈을 몰래 넣어두었다. 새 작업복을 입고 나온 날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에 하루 종일 으쓱거리며 일할 수 있었다. 철없는 짓을 일삼을 때도 묵묵히 감내하던 아내가 이제 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질 줄은 몰랐다. 내가 보은할 기회를 주려는 것 같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내 우선순위는 당신이오’하고 말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움

한 달이 지났을까. 아내가 병실로 올라간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익산에서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이틀 후 아내는 또다시 실신했다. 순식간에 많은 의료진이 달려왔다. 아내를 흔들며 신경 이상을 확인하고 대여섯 개의 약물을 연결했다. “여보” 목청껏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보였다. 내 말이 들리는 걸까. “조금만 참고 곧 다시 봅시다!” 아내의 귀에 대고 말했다. 판막 역류가 여전히 심한 상태여서 현 교수는 흉부외과와 상의해 응급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에도 체외순환기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심장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이동 침대에 누워 나오던 아내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여보, 살려줘서 고마워.” 기력 없는 목소리인데 내 귀에는 고함치는 듯 크게 들렸다. “살아줘서 내가 고맙지.”

기관절개술과 부정맥으로 인한 박동기 삽입 등 치료는 계속됐다.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도 있었다. 중간 정산이었다. ‘1,700만 원을 어디서 구하지….’ 전국의 건축 현장을 다니며 번 돈으로는 어림없었다. 아내를 간호하느라 일을 쉰 기간도 꽤 오래되었다. 혼자만의 시름이 깊어질 무렵 엘리베이터의 안내 영상이 눈에 띄었다. ‘SOS 의료비 지원사업’이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긴급 치료가 필요한 저소득층 환자에게 의료비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에게 기회가 닿을지 반신반의하며 신청했다. 얼마 후 지원이 확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여보, 이제 당신만 힘내면 돼!”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

혼자 일어설 힘도 없는 아내를 현준호 교수는 회진 때마다 직접 앉히고 일으켜 세우며 챙겼다. “환자도 많은데 일일이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흉부외과 교수님이 잘 수술해주신 덕분이죠. 심장이 안정되지 않았다면 제가 이렇게 도와드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심장재활실에 처음 갔을 때는 “현 교수님께서 잘 부탁한다고 연락하셨어요”라며 치료사가 우리를 맞았다. 나에게 아내가 그랬듯, 아내 역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고 있었다. 서는 것도 힘들던 아내는 보행 워커를 잡고 조금씩 걷는 거리를 늘려갔다. 의료진에게 아내를 일임할 수 있는 신뢰가 쌓이면서 그동안의 긴장도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양압기와 기관절개관을 제거하고 어느 정도 걷게 되자 퇴원 결정이 났다. “또 아파서 오시면 그때는 저희도 손 못 댑니다.” 현 교수의 경고가 서운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에게 말 못 한 의사로서의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달라는 당부로 들렸다.

 

복숭아 편지

아내는 병원에서의 기억이 많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의식이 없었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는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의료진의 정성을 느끼면서, 고생하는 가족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키운 것이다. 아직은 위험하니 돌 많은 곳이나 계단을 조심하라는 잔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스스로 걸어보겠다며 열심이다. “자네 고집을 누가 이겨~”하고 투덜대다가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7월 말이 되자 시골집 앞 나무에 복숭아가 가득 여물었다. 달콤한 맛에 감탄하다가 한 해 동안 햇빛과 비바람을 묵묵히 머금고 열린 결실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가장 예쁜 것들을 골라 박스에 넣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수취인은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저희 집에 복숭아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그 맛이 참 좋습니다. 감사 인사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작은 열매에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살맛 나는 하루하루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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